탐험 단계에 상처받은 커플의 특징


이번 오리지널에서는 탐험 시기에 상처와 결핍을 경험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어떤 부부 갈등 패턴을 보이는지 살펴보았다.

서로 추격하고 고립하는 태환 씨와 유미 씨. 그들은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다. 이 불화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이 두 사람이 왜 관계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지 그들의 어린 시절을 통해 알아보자.


탐험의 시기

충분한 격려와 승인이 필요한 때

아이는 대략 2세경이 되면 스스로 걷고, 달리고, 만지고,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에 따라 이동할 수 있는 범위도,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애착의 시기에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은 아이의 경우,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안전감과 신뢰감을 형성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변을 탐색하고자 하는 발달적 충동을 갖게 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탐험과 호기심을 옆에서 지켜봐 주고 경험을 허용해 주며, 그 경험에 대해 반영하고 지지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옷장과 서랍장을 열어 물건을 꺼낼 때, 크레파스를 집어 낙서를 하거나 밖에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부모가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많이 컸구나!" 등 충분한 격려와 승인을 해 주길 바란다. 

부모가 충분한 격려와 승인을 해 줄 때 아이는 바깥 세상을 탐험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 탐험을 통해 부모의 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바깥 세상을 적절히 탐험하고 이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쌓여야 아이는 그 다음 단계인 정체성의 단계로 넘어가 자기만의 독특한 내면세계의 탐색을 시작할 수 있다.


지나친 통제는

고립하는 방어 기제를 형성한다

부모가 아이의 탐색을 승인하지 않고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방해할 때 아이는 숨막히는 경험을 한다. 아이에게 바깥 세상은 새롭고 신기하다. 저 멀리 보이는 연못도 궁금하고 땅에 떨어져 있는 돌도 궁금하며 옆에서 움직이는 강아지나 고양이도 궁금하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다르다. 혹여 아이가 위험에 노출될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부모는 아이의 행동 범위를 제한한다. 가지 못하게 하고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가 자기와 동일한 감정과 흥미를 가지길 바라고 유도하는 부모들이 있다. 아이는 공을 갖고 놀고 싶어하는데 청진기나 주사기를 아이의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아이가 그것을 놓고 다른 장난감을 집으려고 하면 그것을 제지한다.

이때 아이는 어떤 마음이 들까? 아이는 세상을 탐험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부모에 의해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 아이는 더 이상 허용될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된다. 즉, 부모의 인정에 대한 필요를 부인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고 만다. 이러한 적응행동이 강화된 성인은 자기가 경험한 세계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외부와의 접촉도 어렵고 공감 능력도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제는 고립하는 방어기제를 형성했던 태환 씨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태환의 어린 시절,

태환 씨는 외동아들로 부모님의 삶의 중심이자 전부였다. 그의 부모님은 태환 씨를 위해 항상 제일 좋은 것을 주었다. 그의 방은 늘 값비싼 장난감과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고 영어 유치원을 시작으로 사립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등 교육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혜택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대가로 태환 씨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만 했다. 어릴 때부터 그의 부모님은 매번 태환 씨가 할일을 정해 주었다. 하루의 일과를 세워주고 무엇을 입을지도 정해 주었다. 식사 시간 때면 나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곤 했다.

어린 태환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부모님에게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허락을 기대할 수 없었을뿐더러 혹여 부모님이 자기에게 실망하고 그들로부터 창피를 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때론 숨막히고 답답했지만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자기의 내면세계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더이상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모님에게 승인받고자 바라지 않았으며 점차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것 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유미 씨를 처음 봤을 때, 태환 씨는그녀가 자신의 부모님이 누누이 말하던 배우자상과 매우 부합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항상 사랑하고 존경해 줄 여자, 자기가 어디로 가든지 자기를 따라와 줄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했고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다.

유미 씨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자기를 향해 요구하기 시작할 때, 태환 씨는 그녀의 요구가 지나친 통제처럼 다가와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정이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유미 씨는 더 소리를 지르며 협박했고 태환 씨는 물리적으로도 그녀로부터 도망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태환 씨에게 유미 씨와의 접촉은 자기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위협이었다.


무심한 방치는

추격하는 방어 기제를 형성한다

탐험 시기의 아이는 여전히 부모가 옆에 있어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부모의 존재와 반영은 탐험에 대한 불안감을 낮춰주고 용기를 준다. 그러나 주변을 탐색하는 중 부모로부터 방치되어 혼자가 될 경우 아이는 부모의 관심과 승인을 얻기 위해 현란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바깥 세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를 떠나가는 부모를 쫓아 달려가 울며 그의 다리에 매달린다. 혹은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한 행동을 한다.

이 경우 아이는 탐험에 집중할 수 없다. 결국 무엇을 보고 경험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며 자기 경험에 대한 확신 또한 갖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승인받고 싶어하며 중요한 타인의 경험을 자기의 것으로 동일시하고 붙잡고자 한다.


그렇다면 추격하는 방어기제를 형성했던 유미 씨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유미의 어린 시절,

어릴 적 유미 씨는 거의 혼자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로 각자가 일적으로 매우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가정보다는 일을 중시했고 원래는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자 약속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유미 씨를 낳았고 그때부터 두 사람 간의 갈등은 극대화되었다. 두 사람은 양육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기 일쑤였고 그 사이 유미 씨는 홀로 방치되었다. 

유미 씨는 부모님과 외식을 하거나 놀러간 기억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늘 바빴고 자기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려고 할 때면 그들은 항상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유미 씨는 항상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적당한 말만 골라서 했다.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보다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의견을 말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그나마 얻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계속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 태환 씨를 만났을 때, 그는 자기와 달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멋있었고 이 사람이라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고 태환 씨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태환 씨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그가 집을 비울 때면 어린 시절 느꼈던 외로움과 공허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부모님이 자기를 방치했던 것처럼 태환 씨가 자기를 방치한다고 느낄 때 그녀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그의 주의를 끌고자 소리를 지르고 협박했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는 태환 씨 없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로 추격하고 고립하는 태환씨와 유미 씨의 모습은 상당히 역기능적으로 보인다. 유미 씨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태환 씨는 더 꾹 입을 다문다. 그녀가 더 맹렬히 추격하면 추격할수록 그는 더 철저히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상처입은 두 사람이 더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들고 있던 방패를 내려놓을 때에야 치유는 시작된다. 어느 한쪽이라도 방패를 내려놓는 용기를 낸다면 치유의 열쇠가 그의 손에 주어질 것이다.